작성일 : 04-12-17 16:26
[에스오일 사보] 상념 많은 가슴에 붉은 해가 노을진다
 글쓴이 : 에스오일
조회 : 2,131  


지난 여름 미황사에 첫 걸음 했을 때 "장선우 감독이 그냥 퍽퍽 울다가 내려갔다"고 들었다. 세간에 알려진 그의 인생 역정도 그다지 간단치 않거니와 그만의 예술가적 미감(美感)이 미황사와 감응한 결과였으리라.
몇 주 뒤 두번째 걸음에서도 많은 이들이 뜰이며 마당 구석에서 실컷 울거나 명상에 잠긴다는 말을 들으니 이곳 달마산 미황사에서 상처받은 이들의 영혼을 쓰다듬어 주는 심묘한 기운이 있는 모양이다. 억겁의 세월 속에 얽히고 설킨 인연의 실타래가 어찌 한번의 통곡으로 풀어질까만 한 번이라도 미황사에 와 본 이들은 "그럴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차를 버리고 동백 숲길을 지나 절 밑에 당도하면 건물의 모습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가파른 산허리를 감싼 숲과 정상에 자리잡은 눈부신 암벽이 병풍처럼 푸른 하늘에 잠겨 있다. 숲에 포근히 안겨 있는 사찰의 풍경은 욕심과 성냄에 찌든 이들의 가슴으로 들어와 지친 영혼을 어루만져 준다.

"아무 말 하지 마라, 그렇게 그냥 있다 가면 돼!"
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에 자리 잡고 있는 미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둔사의 말사이며 위도상 우리나라 육지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절이다.

조선후기에 건립된 '미황사 사적비'에는 아래와 같은 창건설화가 전한다.

서기 749년(신라 경덕왕 8년)에 한 석선(石船)이 달마산 아래 닿았는데 의조화상이 1백인을 이끌고 가서 목욕재계하고 배를 맞았다. 배에는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금으로 된 상자 속에 화엄경, 법화경 등의 경전과 불상이 들어 있었다. 이를 임시로 봉안하고 그날 밤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나타나서 자신은 인도의 국왕인데,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하리라 하였다.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가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 이름 지은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다웠다 하여 '미(美)'자를 쓰고 '황(黃)은 금인의 색을 취하였다.

창건 이후 수백년 동안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탔다가 1598년 중창하고 1660년, 1754년에 2차, 3차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기록이 전한다. 현재의 전각은 보물 947호인 대웅보전과 보물 1183호인 응진당을 비롯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선원), 달마전(승방), 세심당(수련원) 등이 있다. 여기에 27기의 부도(浮屠)와 탑비(塔碑)가 남아 있는데 이같이 많은 부도와 탑비는 이곳이 조선후기에 사세(寺勢)가 융성했던 큰 절이었음을 말해준다.

대웅전 외벽은 2백여년 세월에 단청이 퇴색하여 목재 본래의 색채와 나뭇결이 거칠게 드러나 있는데 오히려 소박한 자연미가 정감있게 느껴진다. 대웅전 안에는 1천의 부처님을 벽화로 모시고 있어서 삼배만 하면 3천배가 되는 셈이다. 주춧돌에는 자라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또 하나의 불국정토인 용궁을 형상화한 의미와 함께 피안(彼岸)이자 부처의 세계로 중생을 태우고 간다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의 법당이 떠있는 바다를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명부전에는 조선후기 최고의 선비화가인 공재 윤두서(정약용의 외증조, 윤선도의 증손)가 조각한 10대 시왕이 모셔져 있고, 응진전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묵선(墨線)으로 그린 벽화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10여년 전 미황사는 폐허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1백50여년 전부터 거의 버려져서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법당에는 햇빛 한 점 들기 어려웠고, 기거하는 스님들은 병이 나서 떠나고 말았다. 그러다 10여년 전에 현재 주지인 금강스님과 현공스님을 주축으로 불사를 벌여 지금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예불시간 외에는 사찰 복원에 매달린 금강스님에게 인근 마을 사람들이 '지게스님'이란 별호를 달아줄 정도였다.

매월당 김시습은 일출은 낙산사, 낙조의 절경으로 미황사를 꼽았다고 한다. 대웅전 뒤쪽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가히 절경이다. 미황사의 낙조는 계절과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황금빛, 은빛, 붉은색으로 변하면서 진도 앞바다를 물들인다. 이곳에서는 여름. 겨울방학에 4학년 이상의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스님과 함께 하는 7박 8일간의 어린이 한문학당'을 연다. 또 매년 10월 넷째주 토요일에는 '산사 음악회'를 여는데 늦가을의 정취를 음미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만남은 없을 듯 싶다.

미황사에서 달마산의 눈부시게 흰 암벽, 자비로운 부처님, 가슴 아린 낙조, 금강스님이 내준 그윽한 차향과 천진하고도 맑은 그의 웃음을 만났다. 그런대 돌아오는 길에 누굴 만났나 곰곰 생각해보니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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