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17 16:48
[한겨례 신문] 천진정토의 천진불들 - 미황사 ②
 글쓴이 : 곽병찬
조회 : 2,080  

산사에서 보낸편지(10) - 천진정토의 천진불들


두 아이놈이 지엄하신 주지스님 방에 배 깔고 누워있습니다. 나란히 턱을 괸 채 읽고 있는 건 만화가 이현세씨의 <공포의 외인구단>이었습니다. 해괴한 노릇이었습니다. 신도는 스님 앞에서 먼저 삼배로써 예를 표하고, 가르침을 청하는 게 도리로 알고 있습니다.

헌데 초등학교 4~5학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요 놈들은 배깔고 뒹굴거리며 만화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기가 막혔지만, 어찌 하겠습니까. 내 집도 아니요, 내 방도 아니고, 더군다나 내 새끼도 아닙니다. 게다가 나 역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객일 뿐인데. 그리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정도는 확실하게 ‘분별하는’ 교양을 갖추고 있으니 말입니다.

넌지시 물었습니다. “밖에서 놀지, 여기서 뭐하는 거냐.” 뭐 하는지 잘 알면서 그리 묻는 이유는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나가서 놀아라’ 아니겠습니까. 헌데 요놈들이 내놓는 답이란 게 재미있습니다. “차 한 잔 먹을려고 기다리는 중인데요.” 네 놈들이 차 맛이라도 안다더냐.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차 한 잔 얻어먹고자 기다리고 있기는 처지가 마찬가지니,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달마산 미황사는 게으른 아이들의 천국입니다. 사시사철 아이들 발길이 끊이지 않고,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치질 않습니다. 그 사이에 미황사 스님들의 텁텁한 웃음소리도 끼어있습니다. 아이와 스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곳이 미황사 입니다.

대표적인 게 초중등생 초심자를 대상으로 여름방학 때 실시하는 한문학당입니다. 법인 스님이 맡아서 진행하는 이 학당엔 올 여름 40여명의 장난꾸러기들이 몰려왔습니다. 제한을 두지 않으면 서울 등 대처의 아이들로 채워져, 20~30%는 꼭 해남 아이들로 채웁니다.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것도 좋지만, 해남의 한 마을에 터를 잡고 있으니 마을에기여하는 것이 먼저라는 금강 스님의 간명한 소신 때문입니다. 겨울에는 재심자반이 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매주 동네 아이들을 상대로 일요한문교실을 열고 있습니다. 한달에 한번씩 참선공부, 경전공부 하는 날이 계속됩니다. 대개 아이들 중심입니다. 어찌 알았는지 수학여행을 겸한 아이들의 탐방코스로도 잡혀 있습니다.

미황사를 그렇게 버릇없는 아이들의 소굴로 만든 원인 가운데 7~8할은 한문학당이 져야 할 것입니다. 훈장 선생님인 법인 스님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은 스님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아이들에게 근엄하게 보이려고 스님은 세살은 늘려, 62살이라고 대답했죠. 아이들은 반신반의했습니다. 왜 그리 젊어 보이느냐고 말입니다.

불과 나흘 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한 아이가 스님께 진지한 얼굴로 묻더랍니다. “스님, 진짜 연세가 62살 맞아요?” “그럼.” “그래요, 그런데 환갑이 넘은 어른이, 그것도 스님이 왜 그렇게 철이 없어요?" 이미 아이들과 스님은 동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6일째엔 이런 일도 있었답니다. 제법 익숙해졌으니 긴장도 풀렸겠다, 한여름 오후 졸립긴 하겠다, 아이들은 비몽사몽이었습니다. 마침내 애절하게 통사정를 했습니다. 그러면 정신 좀 차리겠거니. “이놈들아! 제발 크게 따라 읽어라. 공부해서 남 주냐?”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한 아이가 이렇게 답했답니다. “스님은 공부해서 남 주고 있잖아요.”

이 정도면 미황사의 분위기를 알만 할 겁니다. 사실 불가에선 아이들을 때묻지 않은 자성 그대로라 하여 천진불이라 합니다. 선불교를 중흥시킨 경허 스님은 이렇게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숙맥처럼, 귀머거리처럼, 봉사처럼, 벙어리처럼, 바보처럼… 어린이처럼 하라. 그러면 모든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야산 호랑이로 불렸던 성철 스님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은 곧 천진한 부처님이야. 모든 어른들은 어린이들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스님을 친견하고자 하는 어른들에겐 3천배를 요구하면서도 아이들에게는 문을 활짝 열어놓았죠. 때론 아이들과 놀다가 다치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제자들이 어린이들의 접근을 막자, 호통을 쳐 문을 열도록 했답니다.

얼마 전 열반하신 혜암 종정스님도 지난 2000년 부처님오신날 법어를 통해 세상 만물이 천진불이라고 선포하기도 했죠. "…아무리 귀천한 사람이라도 인간은 모두 천진불이니 부처와 같이 부모와 같이 모셔서 서로 존경하고 서로 사랑하며 가진 자는 남을 도와주고 권위자는 공심(公心)을 쓸지어다."

아이들이 만화책을 반쯤 읽었을 때 금강 스님이 들어왔습니다. 스님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직접 차를 공손하게 공양했습니다. 아이들은 익숙하게 스님이 따라주는 차를 마셨습니다. 배 깔고 만화 볼 때와는 달리 의젓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댓 잔 마신 아이들은 야, 이제 나가 놀자, 소리치며 일어섰습니다.

미황사를 저희들 놀이터쯤으로 생각하나 봅니다. 그러나 스님도 웃고, 같이 있던 어른들도 웃었습니다. 아마 부처님이 곁에 있었다면 함께 웃었을 겁니다. 대웅전 주춧돌에 연꽃이 피고 게와 거북이가 기어 다니는 절집이니, 뭐 새삼스런 일도 아니긴 하지만 말입니다.

문화부장 곽병찬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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