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17 17:01
밝은 세상 우애를 꿈꾸는 개똥벌레 (1) - 삶이 보이는 창
 글쓴이 : 정혜주
조회 : 1,862  

밝은 세상 우애를 꿈꾸는 개똥벌레

-동화작가 윤기현 선생님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네 저기 개똥무덤이 내 집인 걸…" 이렇게 시작되는 신형원의 노래를
기억하시는지? 혹은 '참새와 허수아비'는?
오늘 그대에게 소개하려는 분은 그 노래들의 원작이 된 동화를 쓰신 분입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해남 땅끝의 아름다운 절이었어요. 덧창문을 열면 수런거리는 푸른 숲과
그보다 더 짙푸른 진도바다가 보이는 제 방, 바로 옆방에 그는 묵었지요. 소설을 쓰러 내려와
있다고 해서 저를 '소설보살' 이라고 부르는 공양주 할머니는 그를 '동화처사'라고 부르더군요.
동화처사. 검게 그을린 농투산이 얼굴에 미소만은 수줍은, 쉰 살이 넘은 사내. 석양녘 부도밭 가는
오솔길을 걸으며, 한여름 밤 요사채 툇마루에 걸터앉아 '소설보살'은 그의 긴긴 이야기를 들었습
니다. 그가 토해내는 이야기는 슬프고 힘있고, 또 어찌나 재밌던지, 배꼽은 잡고 웃다가 문득 문득
숙연해지곤 했습니다.

어린농사꾼

"가난했어요. 천주학쟁이였던 할아버지는 핍박을 피해 해남 윤씨의 집성촌을 떠나 처가인 나주로
가서 살았고, 열 여섯 살인가 나던 해에 아버지는 노름으로 그나마 남은 재산을 다 날리고, 돈
번다고 집을 나가버렸어요. 8남매에서 둘은 일찍 죽고 6남매였는데, 어머니는 학교를 보내준다는
말에 형과 나를 고아원으로 보냈지요. 형이 여덟살, 나는 일곱 살 때였는데, 얼마나 엄니가 보고
싶던지 죽어라고 울어댔지요. 임마, 울지마! 여기서 버텨야지 학교를 갈 수 있단 말이야! 형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뒤안으로 끌고 가서 주먹을 내질러도 울기만 했더니, 며칠만에 집으로 돌려 보내
주더군요. 그때 혼자 남았던 형은 거기서 줄곧 공부해서 나중에 대학 교수가 되었지요."
집에 돌아온 소년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지었답니다. 꼴베기, 소여물 쑤기,
나뭇짐 하기, 참새 보기, 꼴머슴이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하다가 차츰 상일꾼이 되어갔을
때지요.
"근데 어느 날 커다란 고민이 닥쳤어요. 열 아홉 살. 신체검사통지서가 날아온 거예요. 내가 군대에
가면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은 뭘 먹고사나? 막막하더라구요. 밤잠을 못 이루고 걱정을 하다보니
문득 의문이 들기 시작했어요.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이 복 받고 잘 산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지금껏 살아왔는데 정말 그런가? 우리 마을에서 어머니와 나만큼 부지런한 사람들이 또 있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한시도 일손을 놓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계속 가난한가? 처음으로 그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는데. 도무지 풀 길이 없었어요. 그래서 교회 청년회와 마을 친구들을 모아서
함께 조사를 해봤지요. 마을에서 법 없이도 살수 있을 만큼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 열 명을 골라서
그들이 사는 형편을 살펴봤어요. 조사 결과는 전부 중간 이하이거나 최하층이었어요. 이번에는
마을에서 잘사는 사람 열명을 골라서 그들이 일제 때부터 지주나 마름이었거나, 고리채 놀이를
했거나, 관에 붙어서 이웃을 억누른 사람들이었어요. 순수하게 돈을 번 것이 아니라 좋제 않은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죠. 그제야 이 사회가 착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가난할 수밖에 없고, 남을 억누르고 부정직한 사람은 부자가 되는 세상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
어요. 땅만 파던 무지렁이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세상을 보게 된 거지요."
몇 개월에 걸친 조사 작업과 그 깨달음에 저는 어찌나 민망했던지요. 책 몇권 읽고 이 사회의
빈익빈 부익부의 현실을 통달했다고 자부했던 제 스무 살 시절이 되돌아봐지는 순간이었어요.
1960년대 후반, 기독교농민회도 카톨릭농민회도 아직 생기기 전, 그는 교회 청년회 활동을 통해서
차츰 농민운동에 눈 떠가게 되었다고 해요. 그가 다니던 해남 팔산교회가 당시 새롭게 태동하는
민중신학의 요람이던 기독교장로회 계열이었다는 우연도 더해졋지요. 그 시절 그는 설탕이나
단것을 전혀 입에 대지 않을 정도로 금욕적이고 자기 절제력이 강한 청년이었다고 해요. 그런
시골 청년이 어떻게 동화를 쓰게 되었을까요?

서울로 간 허수아비, 일하는 사람의 동화

"교회 성가대의 오르간 연주자라서 매일 저녁 교회에 가서 연습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한 아주머니가 기도하러 와서 통곡을 하는 바람에 연습을 할 수가 없었어요. 무슨 일로 그렇게
서럽게 우냐고 물었지요.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내가 뭣 땜시 사는가 모르겄소, 아그들 보고 이때
꺼정 살아 왔는디, 자석들이 나를 무시해라우. 하면서 통곡을 하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6·25 전쟁
때 남편을 잃고 딸 둘을 키워서 읍내 중,고등학교로 유학까지 보냈다고 해요. 그날은 텃밭에서
푸성귀를 따서 읍내 장에 내다 팔고, 남은 것을 딸들에게 가져다 주려는데, 버스 시간이 어중간
해서 자취방으로 못 가고 학교로 찾아갔대요. 근데 큰딸이 운동장에서 엄마가 올라오는 모습을
본 거예요. 몸베 차림에 얼굴은 시커멓고 올망졸망 보따리까지 이고 진 모습이 부끄러워서 딸이
숨어버렸던가봐요. 변소에 숨어 있다가 친구들에게 들켜서 어머니 앞에 불려온 딸은 더 화가 나고
창피했겠지요. 엄마는 나를 우세시킬려고 왔어? 하면서 보따리를 땅바닥에 패대기치면서 패악을
부리더래요. 결국 어머니는 버스까지 놓치고 30리 밤길을 서럽게 통곡하면서 걸어왔다고 해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라도 그 딸처럼 부끄러울 것 같다, 싶더군요. 그러면 도대체 그 부끄러움의
실체가 뭐냐? 생각해보기 시작했어요. 딸이 공부를 잘하고 책도 많이 읽는 문학소녀라고 하길래,
도서관에서 그 애가 읽었다는 책을 빌려다가 읽어 보았어요. 한결같이 놀고 먹는 사람들을 예찬
하고, 노동하는 사람을 천시하는 하는 내용이라는 걸 발견하게 되었어요. 주인공은 왕자나 공주
이고 일하는 사람은 모두 하녀나 머슴이잖아요. 자기는 공주이고 싶은데 자기부모는 하녀이고
머슴이니 부끄러울 수 밖에요.
그가 시골아이들을 위해서 새로운 동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해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시골 아이들이 농사꾼 부모를 귀하게 여기고 열등의식을
극복하게 해주는 동화, 그는 틈틈이 그런 이야기들을 지어서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시작
했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구독하는 <기독교 교육>이라는 잡지에 나온 동화 현상공모를 보고
응모를 했대요.
"작고 못생긴 수박씨가 사랑의 힘으로 열매를 맺는 이야기였는데, 공책을 뜯어낸 종이에 써서
보냈지요. 몇 달 후에 동화가 당선되었으니 서울로 올라오라고 연락이 왔어요. 시상식장에 갔더니
심사위원 선생님이, 자네 원고가 좋아서 내가 원고지에 정서한 뒤에 제출해서 뽑았다네, 하시면서
원고지 쓰는 용법에 관한 책을 선물로 주시더군요."
그 후 신출내기 동화작가는 틈틈이 작품을 써서 잡지에 발표했다고 해요. 70년대 새마을 운동과
이농, 도시 판자촌의 현실, 농약에 골병들어 죽은 어머니와 서울 공사판에서 다리를 다친 아버지.
실향민 할아버지, 어린 나이에 힘든 목장 일을 하다가 폐병이 걸린 아이…. 이런 이야기들이 묶인
그의 첫 동화집이 이제는 리얼리즘 동화의 고전이 된 『서울로 간 허수아비』예요. 하지만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는 사연도 많고 곡절도 많았다고 해요. 79년에 월간<대화>에서 출간을
준비하다가 잡지가 폐간되는 바람에 청년사로 옮겨지고 다시<창작과 비평사>로, 창비마저 폐간
되어 현암사로 갔다가 1983년에야 <인간사>에서 출간되었지만 곧바로 판금이 되었다고 해요.

해남, 70년대 농민운동이 메카

"동화작가로 등단하기는 했지만 나는 여전히 농사꾼이었고. 내 삷의 중심은 농민운동에 있었어요.
김지하의 시작(時作)메모가 국가보안법으로 걸리던 시절이니, 일기나 메모도 조심해야 했고,
경직된 동료들에게 동화 나부랭이를 쓴다고 비판을 받은 적도 있었지요."
그는 해남 기독교농민회에서 활동하면서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농민지도자 교육에도 참여했다고
해요. 거기서 그는 박현채, 강원룡, 박형규, 이우재, 서남동, 안병무 등 당대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만났고, 비로소 세상을 넓게 보는 안목과 사회를 구조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고 해요.
삶과 이론, 실천에서 활동가의 면모를 갖춰나가기 시작한 그는 70년대 농민운동의 굵직한 싸움들
에서 늘 한가운데 있었답니다. 농지세 싸움. 부역거부운동, 농협민주화싸움…, 그 중 가장 큰
싸움은 정부의 고구마 수매를 둘러싸고 77년부터 2년 동안 벌어진 '함평 고구마 싸움'이었지요.
"고구마를 농협 앞에 쌓아놓고 전량수매를 요구하며 싸우기 시작했지요. 광주 북동 천주교회에서
농민 5천여 명이 모여서 집회와 시위를 하고, 간부들이 열흘간 단식농성을 했어요. 전태일의
분신으로 노동문제가 처음으로 사회화 되었다면 '함평 고구마 사건'은 농민문제를 처음으로 전국
화, 여론화시켰지요. 경찰력이 교회를 겹겹이 포위한 가운데, 전국에서 지지자들이 민가의 지붕을
타고 넘어와서 농성단에 합류를 했어요. 당시에는 사건 하나 생기면 농민, 노동, 종교, 문학, 학계가
총출동하는 식이였죠. 그야말로 '한줌밖에 안 되는 무리'였는데, 단합력도 대단했고 사회적 파급
력도 컸어요."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문익환, 계훈제, 고은, 문병란, 박용석, 이영순 등 이후 20여년 동안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익숙하게 떠오르는 이름들, 혹은 신화가 된 이름들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해남은 함평, 무안, 강진과 더불어서 농민운동의 메카였어요. 한번 집회할 때마다 600여 명
씩 모였는데, 유신반대데모 많이 하기로 소문난 한신대 출신의 젊은 목사 11명이 대거 해남으로
내려와 있었던 탓도 있었지요. 대학생 농활의 단골 마을이었고, <연우무대>의 창단을 준비하는
임진택, 이상우 등 젊은 연극인들이 처음으로 농민과 함께 하는 농촌마당극을 해남에서 시도하기도
했어요. 소설가 황석영이 들어와서 머물기도 했고, 전남대에서 유인물 사건으로 감방을 살고 나온
김남주는 해남이 고향이라서 한동안 살았었지요."
반도의 최남단인 해남에 박정희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근거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곧 솟구칠 해일의 밀물살이 뜨겁고 끈질기게 휘감아 도는 곳. 80년대를 여는 벽두, 이 물살이
태풍의 눈이 되어 소용돌이치는 지점에 광주항쟁이라는, 역사이면서 개개인에게는 운명일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2편에 계속됩니다..

『삶이 보이는 창』2003년 4·5월호 <사람 사람들>中
정혜주 - 소설가, 『창』기획위원의 글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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