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12-17 14:39
佛事, 그 먼 修行의 길
 글쓴이 : 금강스님
조회 : 3,024  

달마산(達摩山) 기슭 미황사(美黃寺)의 해질녘,
멀리 진도(珍島) 바다로 떨어지는 해는
미황사(美黃寺) 대웅보전(大雄寶殿)의 부처님 세 분을 마지막으로 비추고는 사라진다.
이 때는 하늘도 바다도 섬도 산도 부처님도 온통 황금빛으로 물든다.

해질녘부터 어둠이 오기 전까지는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미황사(美黃寺)에 살고부터 생겨난 일이다.
미황사(美黃寺),
몇 번 걸망을 싸고 다시 찾아온 지가 십 년이 흘렀다.

주인 없는 빈 절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구비구비 미황사(美黃寺)를 찾아왔었다.
말 그대로 땅의 끝이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숲으로 둘러싸인 도량(道場)엔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고 음습(陰濕)하기만 했다.
가끔 마을 사람들이 올라와서 인적 드믄 절에 사는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면서 백년 전 미황사가 망하게 된 이야기를 주절이 주절이 늘어놓곤 했다.

'시님 40명이 서산대사(西山大師) 진법군고(陣法軍鼓)를 칠라고 제주도(濟州道)에 갔드라요. 그란디 완도(莞島) 청산도(靑山島) 앞바다에서 태풍(颱風)을 만내갖고 다 죽어분께 미황사는 망(亡)하고 말았지라우.'

백 년 남짓 주인없이 저 혼자 덩그마니 남아 기둥이 썪고 지붕이 내려앉던 미황사.
이 도량에 가람(伽藍)이 하나 둘씩 세워지고 사람들이 모여 살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참배지(參拜地)가 된 데는 한 스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염주(念珠)보다는 줄자가 들려진 날이 더 많아 눈에 띄는 것은 모조리 재고 다니는
현공(玄空) 스님이 바로 그이다.

스님은 미황사 주지 소임을 팔 년 째 맡아오고 있다.
스님은 미황사에 걸망을 내려놓자마자 쌀포대와 집게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도량 곳곳에 널려있는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 석 달동안 쉬지않고 사십 여 포대의 쓰레기를 치웠다.
마을 사람들이 수군대기를 미황사에 청소부 스님이 찾아 왔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모습이었으니 마을 사람들은 더욱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스님을 관찰했을 터이다.

묵은 쓰레기를 다 치우고 난 뒤 스님의 손에는 어느 결에 줄자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대웅보전의 기둥이며,
응진당의 서까래,
심지어 마루판까지 스님은 재고 또 쟀다.
그리고 유심히 들여다보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그렇게 거듭 심사숙고를 한 뒤 스님은 전체 도량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끼니 때가 지나도,
밤이 되어도 스님은 방안에서 나오지 않은 채 구상을 심화하곤 했다.
한 번 구상에 들어가면 완벽한 그림이 그려질 때까지 끊임없이 집중하면서 말이다.

스님은 무엇 하나 허투로 처리하는 법이 없다.
돌멩이 하나 옮기는데도 구상의 흔적이 역력히 묻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미황사에는 미완성(?)의 작품이 많다.
축대를 쌓고난 뒤 남은 돌덩이가 한쪽에 널부러져 있고,
지장 보살님은 오래 전에 새 전각으로 이사 가셨는데 아직 현판이 내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저분하다거나 게으르다고 섣불리 판단하면 금물이다.
스님의 구상이 끝이 나면 그것들은 더 완벽한 모습으로 제 자리를 잡을 테니까.

구상이 완벽하다 싶으면
스님은 틈나는대로 전국의 유명한 절과 옛집들을 돌며 자료를 모아온다.
이때 줄자와 사진기는 필수품이 된다.
스님은 심지어 그 지방의 강수량과 기둥의 높이, 처마의 길이를 비교해보는 치밀함도 잊지 않는다.
목포 측우소를 통해 몇 년 간의 해남 지역 강수량 통계를 뽑아와 집 짓는데 응용하는 철저함은 감히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스님만의 모습이다.

스님의 이런 치밀함과 철저함이 미황사를 일신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 사이 쓰러져 가던 전각에 모셔진 지장 보살님을 새 집으로 모셨고,
대웅전 한켠에 옹색하게 놓여있던 탱화들이 새 집 삼성각을 찾아갔다.
그뿐만이 아니다.
스님들이 사는 요사도 한 채 새로 생겼고,
많은 수를 수용할 수 있는 수련관 건물도 보기 좋게 들어섰다.
담장과 축대 또한 멋스럽고 튼튼하게 세워졌다.
집을 세 채만 지으면 지옥행도 면한다는데 스님은 이미 네 채를 지었고 한 채를 짓고 있으며 앞으로 두세 채는 더 지을 것이니 이미 극락행 티켓을 따놓은 셈이다.

하지만
스님의 이런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이 가끔 마음 불편하게도 한다.
삼년 전 스님이 총무원 감사국장으로 임명되어 내가 잠시 절 살림과 불사를 맡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못미더운지 하루에도 몇 번씩 서울에서 전화로 이 것 저 것 확인을 한다.
스님이 확인하는 내용이라는 것이 아주 소소한 것들이다.

어디에 놓여 있는 돌멩이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거나
비가 오는 날은 우물에 더러운 물이 섞이지 않도록 벨브를 잘 잠그라는 수준의 것들이다.
미황사에 있는 돌덩이 하나까지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는 처지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가끔은 화가 날 때도 있다.
그래서 한 번은 참다 못 해
"나에게 맡겼으면 한번 믿어보라." 라는 요구를 했더니
서운 하셨던지 두 달간이나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또 안되는 모양이었다.
딱 1년만에 종단의 중요 직책마저 내놓고 다시 내려와 줄자를 들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기 시작했다.

항상 심각하던 스님 얼굴에 얼마 전부터는 빙긋이 웃는 모습이 엿보인다.
아마 명부전이 완성되고 부터인 것 같다.
법당을 짓는 불사이기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이라도 동참해야 된다며
부처님의 칠가식 정신으로 가난한 집이나, 부자집이나 할 것 없이 인연을 지으려 했던 스님 모습이 생각난다.

스님과 인연 맺어 살아온 지 이십년 가까이 된 것 같다.
생각해보면 미황사에 짐 부르고 사신 팔 년,
스님은 불사를 하신 게 아닌 것 같다.

깊고 넓은 수행을 하셨던 것이다.
불사는 겉으로 맺어진 결과일 뿐일테고.

(1996년 봄에 봉은지에 쓴 글을 옮깁니다)

200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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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oche 18-08-30 08:54
답변 삭제  
언제 읽어도 훈훈하고 감동적인 아름다운 글입니다.
두 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스님께서는
그러니까
개와 늑대의 시간을 좋아하시는군요~^^
그 가물가물한 시간,
무엇이나 아무것이나 반추할 수 있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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